예술2015. 1. 15. 11:00

내가 어릴때

오페라의 유령 정식 배우들이 내한을 해서 예술의 전당에서 공연을 하기에

어머니께서 교양도 기를 겸, 놀러가는 겸 해서 공연을 보러 가자고 하셨었어.

나는 촌에서 자란 촌놈이라 그런 데 처음 가봤지.

그 때 로얄석에 앉았었는데 티켓이 30만원이었던 것으로 기억한다.

나는 오페라가 너무 유치하고 지루하다고 생각해서 안보려 했었는데 돈이 아까워서 보러 갔지.

오페라의 유령은 영어로 공연을 하고 자막을 옆에 띄워주는 식이었는데도

가슴이 벅차고 눈물이 흘렀었다.

 

 

 

 

그렇게 벅찬 가슴을 가진 상태로 공연이 끝났고 우리는 예술의 전당에 있는 미술 전시회로 가는 중이었다.

나는 잠시 선물가게로 들어갔는데 거기에서 본 것이 바로 프리다칼로의 자화상이 그려져있는 노트였다.

너무 특이하고 아름답게 그려진 표지가 있는 노트를 보는 순간 나는 뭔가 되게 신선한 충격을 받아서 바로 사놓고

지금까지도 잘 보관해놓고 있다.

그림을 보고 그렇게 화들짝 놀랐던 것은 그게 처음이었어.

 

 

 

 

 

 

오늘 내가 너희들에게 소개해주고 싶은 화가는 바로

멕시코의 대표적인 여성화가 '프리다 칼로'

이 여자는 힘들고 특이한 삶을 살면서 자화상으로 자신의 처지를 표현하는 것으로 유명해.

생긴 것도 특이하지? 갈메기 눈썹에 남자처럼 수염도 거뭇하고 나있고 ㅋㅋ

내가 이 그림에 반한 이유도 그 특이함 때문이었어.

 

 

 

 

 

 

프리다 칼로는 1907년 멕시코의 코요아칸이라는 동네에서 태어났어.

그녀의 어린 시절은 한창 멕시코의 독재정부에 반하는 혁명이 일어나는 시기였어.

그녀는 6살 때 소아마비를 앓아서 다리를 절면서 다녔어.

그런데 이 사람이 집안도 괜찮고 머리도 좋아서 우리나라로 치면 민사고정도 되는 에스쿠엘라 국립 예비학교에 들어갔어.

전교생이 2000명인데 그 중 여자는 35명에 불과했다는 것을 보면 장애가 있었던 프리다칼로는 정말 대단한거지.

 

 

 

 

 

잘 모르는 사람들한테 보여주기 민망한 그림이다.

참 아름다운 그림인데 ㅋㅋ

 

 

여튼 프리다 칼로는 그 학교에서 생물학, 해부학을 공부하면서 의사가 되기로 했어.

장애를 가지고도 대단하다는 생각이 드는건 동아리도 가입해서 즐겁게 보내고 사랑도 하고 그랬어. 그림도 가끔 그렸고.

 

 

 

 

 

 

그러던 어느 날

프리다 칼로에게 진로를 바꿀만한 어마어마한 사건이 발생했어.

18살이 되던 해에 스쿨버스를 타고 가다가 운전기사가 전차랑 박어버렸어.

철로 된 봉이 옆구리 살을 뚫고 들어가서 골반을 지나서 허벅지로 빠져나왔고 오른발은 짖이겨져서 산산조각이 났지.

 

 

그녀를 치료했던 의사들은 그녀가 다시는 걸을 수 없을 것이라고 했고

전신 깁스를 한 채로 9개월을 보냈어.

 

그 9개월동안 손만 조금 쓸 수 있었기 때문에 그녀는 그림을 그리기로 했어.

그런데 어느 것 하나 그릴 것이 없어서 자기 얼굴을 그렸지.

이 것이 그녀의 거의 모든 작품이 자화상이 된 계기야.

 

 

 

 

 

그렇게 9개월이 지나고 프리다 칼로는 열심히 재활치료를 해서 기적적으로 두손 두 발 다 들 수 있게 됐어.

 

그렇게 얼마동안 그림을 그리다가 그녀는 문득 "나의 재능을 평가받고싶다"라는 생각을 하게 됐고

당대 최고의 멕시코 화가인 리베라를 찾아갔어.

그 사람은 그림을 보자마자 극찬을 했어.

 

 

 

 

<왼쪽이 리베라>

 

 

그렇게 리베라는 칼로에게 화가라는 꿈에 대한 확신을 주었고 둘은 사랑에 빠졌고 결혼을 했어.

 

하지만 리베라는 가장 유명한 화가인 만큼 엄청난 난봉꾼이었어.

칼로와 21살이 많은 나이임에도 불구하고 항상 바람을 피고 헤어진 후에 칼로에게 다시 돌아왔다가

새로운 여자를 만나고 했지.

그녀는 리베라를 너무 사랑해서 항상 붙잡고싶어 했지만 안된다는 걸 깨닫고

자신도 술을 흥청망청 마시고 여행을 떠나고 새로운 사랑도 하고 동성연애도 해보고 했어.

 

 

 

 

 

 

 

그 동안 칼로의 안좋았던 몸은 더 악화됐지.

남편에 대한 서운함, 공허함

그리고 아픈 몸은 프리다 칼로가 평생 짊어지고 가야 할 숙제가 되었어.

그녀가 오죽했으면 그와의 결혼을 "10대 때 겪은 차사고 이후의 두 번째 사고"라고 했겠어.

 

 

 

 

 

남편인 리베라는 항상 외도를 했는데 어느 날 그녀에게 이혼요구를 했어.

다른 여자가 생겼다고 말이야.

그녀는 마음이 찢어졌지만 그를 위해 이혼을 해줬어.

그 후로 칼로는 분노와 상실감에 빠져 피폐한 삶을 살아갔어.

 

 

 

 

 

 

 

마음이 힘들어서인지 그녀의 척추 상태는 급속도로 악화되었고

여러번의 수술 끝에 겨우 건강을 약간 회복해서 미국에서 멕시코로 돌아왔어.

이 시기에 전남편이었던 리베로가 찾아와 재혼을 하자고 했어.

조건이 있었는데 섹스금지, 경제적 독립이었어.

칼로는 승락하고 재혼을 했지.

 

그 후로도 리베라는 외도를 자주 했지만 칼로는 더 이상 신경쓰지 않았어.

오로지 그림만을 그렸다.

 

 

 

 

 

하지만 1940년 말부터 건강이 악화된 그녀는 오른쪽 다리를 절단하게 되었고 평생 휠체어 생활을 하게 됐어.

그러면서도 하루에 3~4시간씩 그림을 그렸어.

 

 

 

 

 

 

 

1953년 그녀는 남편 리베라가 열어 준 그녀의 첫 번째이자 마지막 전시회를 하게 되었어.

아픈 몸이지만 칼로는 침대에 누운 상태로 파티처럼 전시회를 즐겼고 노래도 불렀어.

 

 

 

 

 

그리고 나서 1년,

1954년 7월에 '당신을 빨리 떠날 것 같다'고 하면서 한달도 더 남은 결혼 25주년 선물을 남편에게 주고

그 날 새벽 먼저 하늘로 가게됬어 

 

 

 

 

 

그녀가 죽고 1년 후 남편은 함께 살던 집을 나라에 기증하고 현재까지 프리다칼로 박물관으로 사용되고있어.

1970년대에 페미니즘이 붐을 일으키면서 페미니스트들이 그녀의 작품에 관심을 가지면서 다시한 번 유명해졌고

멕시코정부는 프리다칼로의 그림을 국가 보물로 지정했어.

 

 

 

 

 

 

아 참, 그녀가 이렇게 여성성과 남성성을 함께 표현한 이유는 그녀가 실제로 패미니스트였기 때문이야.

그 당시에는 패미니즘이라는 개념이 정확이 없었지만 그녀는 그 무엇인가의 성향을 가지고 있었어.

 

 

 

그녀의 작품 하나 하나를 모두 설명하려면 하룻밤을 새도 모자란데 나는 여기까지 작가 소개를 해주고

작품 하나 하나에 대한 궁금한 점은 각자 알아보면 될거야

 

 

 

<프리다 칼로의 일대기를 그린 영화도 개봉했었고 꽤 유명했다.>

 

 

 

 

 

 

 

 

 

마지막으로 프리다 칼로의 작품들을 올려줄게.

편안히 감상해

 

 

 

 

 

 

 

 

 

 

 

 

 

 

 

 

 

 

 

 

 

 

 

 

 

 

Posted by 쉬어가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