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은 적국의 여자란 이유로 비참한 죽음을 맞이한 마리앙투아네뜨에 대해 포스팅 해 볼게
당시 오스트리아는 프로이센의 위협을 받고 있었기에
그녀의 어머니인 마리아 테레지아는 전통적인 외교 관계를 전환하여
그간 적대국이었던 프랑스와 동맹을 강화하려고 했고,
그 일환으로 프랑스의 도팽인 루이 오귀스트와 그녀를 정략 결혼시키려 하였다.
프랑스 역시 신흥국가인 프로이센을 견제키 위해 평소 앙숙이었던 오스트리아와의 협력이 필요했고
퐁파두르 후작 부인이 나서서 오스트리아의 공주 마리 앙트아네트와 루이 오귀스트의 정략결혼의 계기를 마련하였다.
그녀는 프랑스 왕실에서 적국 출신이라는 출생적 이질감에서 오는 소외와 외로움을 달래기 위해서 사교에 몰두했다. 여러 총신들을 총애했으며 베르사유 정원 한 구석에 있는 프티 트리아농(앙투아네트가 첫 딸을 출산 후, 루이가 선물한 별장)에서 파티나 가면무도회를 열기도 하고 시골처럼 꾸며놓고 전원생활을 즐기기도 하며 그간 쌓인 스트레스를 풀었다고 전해진다.
프랑스의 다른 왕비들과 비교하면 마리 앙투아네트가 쓴 돈은 그다지 많은 수준이 아니었다.
루이 16세가 검소했던 탓에 이들 부부는 왕실 예산 중 겨우 1/10 정도만 사용했을 뿐이었지만,
이미 왕실의 재정상태가 좋지 않았다.
희고 고운 피부와 탐스러운 머리, 늘씬한 체형을 가지고 있던 마리는 복장과 머리 손질에 관심이 많았고
당시 프랑스 패션을 주도하고 유행을 선도했다.
더구나 당시 프랑스 왕실이 왕비가 옷을 갈아입는 것과 화장하는 모습까지도 모두 공개하던 탓에 베르사유 궁전에는
왕비를 구경하려는 사람들로 매일 북새통을 이루었고,
적국 출신의 왕비로 본래 곱지 못한 시선을 받던 처지라 그녀에 대한 소문은 좋지 못하게 퍼져나갔다.
그녀는 ‘적자부인’이라는 비난 어린 별명으로 불리게 되었으며 이로인해 모후인 마리아 테레지아는 그녀에게 보내는 서신에서 이를 걱정하기에 이르렀다.
이러한 와중, 궁정 내에서는 마리 앙투아네트와 스웨덴 귀족 한스 악셀 폰 페르센 백작의 염문이 확산되고있었다. 그녀는 폴리냑 백작 부인 등 자신이 마음에 드는 소수의 귀족들만을 극단적으로 총애했고 그로인해 그녀의 그룹에 끼지 못한 귀족들은 그녀와 총신들을 향해 매일같이 악담을 퍼부었다. 베르사유 외의 다른 장소, 특히
파리에서는 이러한 정세가 심했다. 더구나 '빵이 없으면 케이크를 먹으라 하라'는 말은 한적이 없지만 혁명군들은 이말을 정치적 선동을 위해 고의적으로 퍼뜨렸다.
결과적으로 여러 유언비어들은 파리 민중들의 증오를 가중시키며 마리를 죽음으로 내몰았다.
민족주의에 깊이 물든 혁명기의 민중에게 마리 앙투아네트는 다른 무엇보다도 오스트리아 여자였고 반역자였다. 1793년 10월 15일, 그녀는 혁명 재판으로부터 사형 판결을 받았으며, 다음날인 10월 16일, 콩코드 광장에서 남편의 뒤를 따라 단두대에 의해 참수당했다.
참수형 당일, 마리 앙투아네트는 특별 죄수로서 거름통을 싣는 짐수레에 실려 처형장으로 끌려갔다.
(루이 16세의 경우 역시 마찬가지였다).
콩세르쥬리 감옥에서 나올 때 그녀는 머리카락이 짧게 깎여져 있었으며 두 손은 뒤로 묶여져 있었다.
합스부르크 왕가의 사람답게 품위를 중시했던 그녀는 반혁명의 혐의로 3일 간 받은 심문 내내 의연하고 담대한 모습을 보였으며 형장의 이슬로 사라지는 순간에도 품위를 잃지 않았다. 혁명 직전, 마리 앙투아네트는 편지글에 "불행 속에서야 겨우 인간은 자기가 누구인가를 알 수 있습니다" 문구를 남겼고, 사형장에서 사형 집행인의 발을 실수로 밟아버렸을 때에도“미안해요. 일부러 그런 것이 아니었어요.”라며 에티켓을 지킨 마지막 말을 남겼다.
기본적으로 단두대로 처형할 시에는 사형수의 얼굴을 아래로 향하게 하였지만, 마리 앙투아네트의 경우는 얼굴을 일부러 위로 향하게 해서 위에서 칼날이 떨어져 내려오는 것을 볼 수 있게 했다는 소문이 있으나 진위는 불분명하다.
아마도 이러한 이야기는 그 당시 그녀에 대한 프랑스 국민들의 증오심이 얼마나 격렬했는지를 보여준다고 할 수 있다. 또한 사형집행일 전날 머리카락이 하룻밤만에 하얗게 세어버렸다는 설이 있으나, 과학적으로 그런 급속한 변화의 가능성은 희박한 것으로 보인다.
당시 오스트리아와 프랑스는 앙숙관계였고, 두 국가간의 전쟁으로 프랑스는 많은 아들과 형제들을 잃었으며 국민 대부분이 오스트리아에 적대감을 가지고 있었다.
그 두 나라의 화해와 동맹을 위해 앙투아네트는 프랑스로 왔지만 역사의 소용돌이에 휘말려 프랑스 혁명의 원인이라는 죄를 뒤집어썼다.
그녀가 왕비로 있었을 때 국고가 파산지경이었던 것은 사실이나, 그것은 그녀의 사치 때문이 아니라 선대의 향락과 미국 독립 전쟁 지원 때문이었고, 그것은 그녀의 선택이 아니었다.
결혼당시 15살밖에 안된 정치에는 무관심한 순수한 마음을 가진 행복한 소녀였던 마리앙투아네트는 '사치와 환락의 궁전'으로 알려진 쁘띠 트리아농 궁에서 실제는 시골처럼 꾸며놓고 전원생활을 즐겼을 뿐이었다.
그녀는 프랑스 왕실에서 유일하게 소작인의 밭에 마차를 몰아 밭을 망치지않게 배려한 사람이었으며 루이 16세가 활을 쏘다 실수로 농민을 다치게했을때에도 직접 치료를 해준 사람이었다.
그녀는 가난한 사람들에게 동정심을 가지고 있었으며 프랑스 왕비로선 이례적으로 빈민구제와 프랑스식 농경생활에 관심을 가졌다.
빈민구제를 위해서 자신의 드레스를 직접 팔고 당시 악마의 음식이라고 불린 감자에 혐오감을 없애기 위해 직접 꽃을 꽂아 나눠주거나 감자꽃을 머리에 꽂았으며 그녀는 오히려 그녀의 딸 마리 테레즈에게 사치를 도외시하고 가난한 사람들을 이해하도록 가르치다 딸의 불만을 사기도 했을만큼, 천상여자로 아름답게 꾸미고 자애롭게 돌보는 것을 좋아했던 여인이었다.
유명한 다이아몬드 목걸이 사건 역시, 마리 앙투아네트가 결백하다고 알려진지 오래다. 그 목걸이는 애초 루이 15세가 애첩 마담 뒤 바리의 사치를 위해 제작된 것이고, 마리 앙투아네트는 그 목걸이 구입을 거부했다.
'빵이 없다면 과자를 먹으세요"라는 말도 원래는 거리에서 굶고 있는 아이들을 보고 신하에게 "저 아이들에게 브리오 슈를 주세요"였지만 혁명군은 의도적으로 그말을 왜곡해서 퍼뜨렸다. 더구나 아들을 무척 사랑했던 앙투아네트는 혁명군 측의 음모로, 재판에서 아들을 성추행했다는 누명을 쓰기도 했다.
당시 8살이었던 루이 17세는 마약까지 먹은 상태로 그것이 무슨 뜻인지도 모르고 동의했고, 그것은 마리 앙투아네트 생애 가장 큰 상처였다.
마리 앙투아네트는 끝까지 위엄으로써 많은 오욕에도 잘 견디고 품위있는 태도를 보였다.
'해외' 카테고리의 다른 글
중국인들이 싫어하는 선물은 어떤게 있을까? (0) | 2014.11.25 |
---|---|
일본은 욕먹어 마땅하다! (후쿠시마 원전사고 대처) (0) | 2014.11.18 |
나이아가라폭포의 충격적인 진실 (0) | 2014.10.28 |
일본 생활보호대상자의 현실, 오사카 (1) | 2014.10.13 |
아프리카의 괴물, 모켈레-음베음베 (0) | 2014.09.01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