해외2014. 11. 18. 17:13

후쿠시마 원자력 발전소 사건과 관련해서 항상 많이 언급되는

 

1986년 체르노빌 원자력 폭발사고에서 소련은 어떻게 대처하였을까?

 

 

 

 

체르노빌 발전소가 폭발하자

소련 당국은 우선 발전소 노동자들을 위해 건설한 신도시 프리피야트 주민 약 5만명을

 

1100여대가 넘는 버스를 동원해 하루 아침에 전부 탈출시켰어

 

 

 

 

 

 

 

 

 

지금도 버려진 도시로 남아있는 프리피야트시

 

 

그리고 프리피야트 시를 시작으로 반경 30km 이내의 주민 전체를 대피시키는 작업이 진행되었고

 

사고 이후 약 4달에 걸쳐서 피폭 지역 주민들 전체를 대피시키는 대역사가 진행되었어

 

 

 

 

 

그리고 소련 전역에서 약 60만명이 넘는 노동자와 군인들을 징발해서 발전소 화재를 진압하고, 지하수맥을 봉쇄하는 작업을 실시하였고

 

사고 발생 6개월만에 발전소 전체를 감싸버리는 석관을 완공했어

 

 

 

 

 

 

 최근에는 이렇게 사고 당시 지었던 석관 위에 더 크고 완전한 석관을 덧씌우고 있는 작업이 진행중이다.

 

 

 

물론 소련의 방식은 공산 독재 국가답게 노동자들의 안전이나 인권을 무시한 강압적인 면모가 강했어.

 

 

애초에 60만명이나 동원한 것도

 

 

" 하 ..... 노동자들 개개인을 피폭으로부터 완전히 보호할 수가 없으니까 일단 존나 많은 인원을 징발해 여러 조로 나눈 다음 많은 사람을 조금씩 피폭시켜버리자. 피폭이 심하면 죽지만 약간의 피폭은 인체가 견딜 수 있다며? "

 

 

라는 지극히 러시아스러운 마인드에서 비롯된 것이었으니까.

 

 

하지만 여기서 알 수 있는 점은

 

 

천하의 소련조차 방사능의 위험성을 인정하고

그것을 봉쇄하기 위해 별의별 수단을 다 썼다는 것이다.

 

 

 

 

반면 일본은?

 

 

 

 

 

 

후쿠시마 사고에서 유출된 방사능 양이 18억 천만 베크렐 세슘으로

 

체르노빌 사고에서 유출된 방사능 양인 10억 5천만 베크렐 세슘을 능가함에도 불구하고

 

 

 

 

주민들을 대피시키기는 커녕

 

후쿠시마 인근 해수욕장에 떠들썩한 오픈 행사를 열지 않나

 

 

 

 

 

심지어 지역 경제를 살린다는 명목으로 후쿠시마 산 농산물을 전국적으로 유통시키려고 하고 있어

 

http://www.jpnews.kr/sub_read.html?uid=15542&section=sc1&section2

 

 

 

다들 알다시피 공산 독재 국가에 국가가 언론을 완전히 통제했던 소련조차

 

 

저런 식으로 피폭 지역의 상품이나 농산물을 유통시키려고 했던 미친 짓거리는 시도했던 적 조차 없다.

 

 

 

Posted by 쉬어가요
해외2014. 11. 17. 17:38

오늘은 적국의 여자란 이유로 비참한 죽음을 맞이한 마리앙투아네뜨에 대해 포스팅 해 볼게

 

당시 오스트리아는 프로이센의 위협을 받고 있었기에

그녀의 어머니인 마리아 테레지아는 전통적인 외교 관계를 전환하여

그간 적대국이었던 프랑스와 동맹을 강화하려고 했고,

그 일환으로 프랑스의 도팽인 루이 오귀스트와 그녀를 정략 결혼시키려 하였다.

 

프랑스 역시 신흥국가인 프로이센을 견제키 위해 평소 앙숙이었던 오스트리아와의 협력이 필요했고

퐁파두르 후작 부인이 나서서 오스트리아의 공주 마리 앙트아네트와 루이 오귀스트의 정략결혼의 계기를 마련하였다.

 

그녀는 프랑스 왕실에서 적국 출신이라는 출생적 이질감에서 오는 소외와 외로움을 달래기 위해서 사교에 몰두했다. 여러 총신들을 총애했으며 베르사유 정원 한 구석에 있는 프티 트리아농(앙투아네트가 첫 딸을 출산 후, 루이가 선물한 별장)에서 파티나 가면무도회를 열기도 하고 시골처럼 꾸며놓고 전원생활을 즐기기도 하며 그간 쌓인 스트레스를 풀었다고 전해진다.

 

프랑스의 다른 왕비들과 비교하면 마리 앙투아네트가 쓴 돈은 그다지 많은 수준이 아니었다.

루이 16세가 검소했던 탓에 이들 부부는 왕실 예산 중 겨우 1/10 정도만 사용했을 뿐이었지만,

 

이미 왕실의 재정상태가 좋지 않았다.

희고 고운 피부와 탐스러운 머리, 늘씬한 체형을 가지고 있던 마리는 복장과 머리 손질에 관심이 많았고

 당시 프랑스 패션을 주도하고 유행을 선도했다.

 

더구나 당시 프랑스 왕실이 왕비가 옷을 갈아입는 것과 화장하는 모습까지도 모두 공개하던 탓에 베르사유 궁전에는

왕비를 구경하려는 사람들로 매일 북새통을 이루었고,

적국 출신의 왕비로 본래 곱지 못한 시선을 받던 처지라 그녀에 대한 소문은 좋지 못하게 퍼져나갔다.

 

그녀는 ‘적자부인’이라는 비난 어린 별명으로 불리게 되었으며 이로인해 모후인 마리아 테레지아는 그녀에게 보내는 서신에서 이를 걱정하기에 이르렀다.


이러한 와중, 궁정 내에서는 마리 앙투아네트와 스웨덴 귀족 한스 악셀 폰 페르센 백작의 염문이 확산되고있었다. 그녀는 폴리냑 백작 부인 등 자신이 마음에 드는 소수의 귀족들만을 극단적으로 총애했고 그로인해 그녀의 그룹에 끼지 못한 귀족들은 그녀와 총신들을 향해 매일같이 악담을 퍼부었다. 베르사유 외의 다른 장소, 특히

 

 

파리에서는 이러한 정세가 심했다. 더구나 '빵이 없으면 케이크를 먹으라 하라'는 말은 한적이 없지만 혁명군들은 이말을 정치적 선동을 위해 고의적으로 퍼뜨렸다.

 

결과적으로 여러 유언비어들은 파리 민중들의 증오를 가중시키며 마리를 죽음으로 내몰았다.


민족주의에 깊이 물든 혁명기의 민중에게 마리 앙투아네트는 다른 무엇보다도 오스트리아 여자였고 반역자였다. 1793년 10월 15일, 그녀는 혁명 재판으로부터 사형 판결을 받았으며, 다음날인 10월 16일, 콩코드 광장에서 남편의 뒤를 따라 단두대에 의해 참수당했다.

 

 

 

 

참수형 당일, 마리 앙투아네트는 특별 죄수로서 거름통을 싣는 짐수레에 실려 처형장으로 끌려갔다.

(루이 16세의 경우 역시 마찬가지였다).

콩세르쥬리 감옥에서 나올 때 그녀는 머리카락이 짧게 깎여져 있었으며 두 손은 뒤로 묶여져 있었다.

합스부르크 왕가의 사람답게 품위를 중시했던 그녀는 반혁명의 혐의로 3일 간 받은 심문 내내 의연하고 담대한 모습을 보였으며 형장의 이슬로 사라지는 순간에도 품위를 잃지 않았다. 혁명 직전, 마리 앙투아네트는 편지글에 "불행 속에서야 겨우 인간은 자기가 누구인가를 알 수 있습니다" 문구를 남겼고, 사형장에서 사형 집행인의 발을 실수로 밟아버렸을 때에도“미안해요. 일부러 그런 것이 아니었어요.”라며 에티켓을 지킨 마지막 말을 남겼다.

 

  

기본적으로 단두대로 처형할 시에는 사형수의 얼굴을 아래로 향하게 하였지만, 마리 앙투아네트의 경우는 얼굴을 일부러 위로 향하게 해서 위에서 칼날이 떨어져 내려오는 것을 볼 수 있게 했다는 소문이 있으나 진위는 불분명하다.

아마도 이러한 이야기는 그 당시 그녀에 대한 프랑스 국민들의 증오심이 얼마나 격렬했는지를 보여준다고 할 수 있다. 또한 사형집행일 전날 머리카락이 하룻밤만에 하얗게 세어버렸다는 설이 있으나, 과학적으로 그런 급속한 변화의 가능성은 희박한 것으로 보인다.


당시 오스트리아와 프랑스는 앙숙관계였고, 두 국가간의 전쟁으로 프랑스는 많은 아들과 형제들을 잃었으며 국민 대부분이 오스트리아에 적대감을 가지고 있었다.

 

그 두 나라의 화해와 동맹을 위해 앙투아네트는 프랑스로 왔지만 역사의 소용돌이에 휘말려 프랑스 혁명의 원인이라는 죄를 뒤집어썼다.

 

그녀가 왕비로 있었을 때 국고가 파산지경이었던 것은 사실이나, 그것은 그녀의 사치 때문이 아니라 선대의 향락과 미국 독립 전쟁 지원 때문이었고, 그것은 그녀의 선택이 아니었다.

 

결혼당시 15살밖에 안된 정치에는 무관심한 순수한 마음을 가진 행복한 소녀였던 마리앙투아네트는 '사치와 환락의 궁전'으로 알려진 쁘띠 트리아농 궁에서 실제는 시골처럼 꾸며놓고 전원생활을 즐겼을 뿐이었다.

그녀는 프랑스 왕실에서 유일하게 소작인의 밭에 마차를 몰아 밭을 망치지않게 배려한 사람이었으며 루이 16세가 활을 쏘다 실수로 농민을 다치게했을때에도 직접 치료를 해준 사람이었다.

그녀는 가난한 사람들에게 동정심을 가지고 있었으며 프랑스 왕비로선 이례적으로 빈민구제와 프랑스식 농경생활에 관심을 가졌다.

빈민구제를 위해서 자신의 드레스를 직접 팔고 당시 악마의 음식이라고 불린 감자에 혐오감을 없애기 위해 직접 꽃을 꽂아 나눠주거나 감자꽃을 머리에 꽂았으며 그녀는 오히려 그녀의 딸 마리 테레즈에게 사치를 도외시하고 가난한 사람들을 이해하도록 가르치다 딸의 불만을 사기도 했을만큼, 천상여자로 아름답게 꾸미고 자애롭게 돌보는 것을 좋아했던 여인이었다.

 

유명한 다이아몬드 목걸이 사건 역시, 마리 앙투아네트가 결백하다고 알려진지 오래다. 그 목걸이는 애초 루이 15세가 애첩 마담 뒤 바리의 사치를 위해 제작된 것이고, 마리 앙투아네트는 그 목걸이 구입을 거부했다.

'빵이 없다면 과자를 먹으세요"라는 말도 원래는 거리에서 굶고 있는 아이들을 보고 신하에게 "저 아이들에게 브리오 슈를 주세요"였지만 혁명군은 의도적으로 그말을 왜곡해서 퍼뜨렸다. 더구나 아들을 무척 사랑했던 앙투아네트는 혁명군 측의 음모로, 재판에서 아들을 성추행했다는 누명을 쓰기도 했다.

당시 8살이었던 루이 17세는 마약까지 먹은 상태로 그것이 무슨 뜻인지도 모르고 동의했고, 그것은 마리 앙투아네트 생애 가장 큰 상처였다.

마리 앙투아네트는 끝까지 위엄으로써 많은 오욕에도 잘 견디고 품위있는 태도를 보였다.

 

 

Posted by 쉬어가요
해외2014. 10. 28. 11:31

나이아가라폭포의 충격적 진실이라는 제목이 화제가 되고 있습니다.

 

아래사진을 보시면 바로 아실텐데

 

세계적 관광지 자연환경인 나이아가라 폭포가

 

알고보면

 

도시 바로옆에 있네요

 

차타고 배타고 한참 가야되는줄 알았더니 ....

 

 

 

Posted by 쉬어가요
해외2014. 10. 13. 11:08

경제대국 일본의 전체 생활보호대상자는

 

현재 1,570,823세대    2,15,1,165명이다. 

 

 

200만명이 넘는 생활보호대상인구는 전체 일본인구의 1.69%로  59명중  1명에 해당하는 인구다.

 

이는 10년(약 115만명)전에 비하면 80%이상 늘어난 수치다. 1억중산층을 자랑하던 일본경제도 불황에 늪에

 

 예전보다 양극화가 심해졌단걸 알수있다.

 

 

 

 

일본의 생활보호대상자의 기준은

 

3인가족기준으로 1달생활비  13만680엔~16만7170엔(약 한국돈 160만~200만원 , 지역에 따라 다름)가 생활보호수급자의 기준이다.

 

간혹 이 생활보호수급을 부정수급하는 자가 있기때문에 문제가 일어나기도 한다.

 

한해에 생활보호수급액으로 들어가는 돈은 일본전체에서 약 2조6천억엔에 이른다.

 

 

 

 

 

그럼 일본에서 가장 생활보호대상비율이 높은 지역은 어디일까?

 

바로 관광지로 유명한 오사카다.

 

최근 방사능의 위험성으로 인해 도쿄대신 오사카로 여행이나 워홀,유학을 가는 이들이 상당히 늘었다.

 

오사카는 일본 제2의 도시로

 

굳이 비교하자면 한국 부산이라고 할수있다.

 

오사카시장은 한국에서도 유명한 극우파 하시모토 토오루이며 재일교포가 일본에서 가장 많이 살고있다.

 

 

 

△ 오사카시의 전경  

 

오사카가 바로 일본에서 가장 빈민들이 많으며, 경제상황도 좋지않고  실업률도 높으며,

 

독거노인도 많고 생활보호대상자도 제일 많은 지역이다.

 

오사카의 주요관광지라 할수있는 남바,도톰보리, 우메다, 오사카성,카이유칸 등등을 주로 방문하는 관광객들은

 (사실상 위에 열거한 곳이 관광지의 다라고 할수있다..하루나 이틀이면 다 볼수있다.

나머지는 교토+나라+고베등 오사카 인근을 추천한다.)

 

오사카의 화려한 모습, 발달되어 있는 모습만 보기에 오사카가 일본에서 가장 가난하며,

 

빈민이 많은 도시라고 하면 놀랄지도 모른다.

 

일본인들은 오사카=재일교포가 가장 많은 도시로 깎아내리며  오사카에 빈민이 많은 이유는

 

재일교포가 제일 많기때문이라고 깎아내리기도한다.

 

전체재일교포 40만명중 생활보호대상세대수는 약 27,000세대(일본전체 수급자 1,570,823세대의 약1.7%)정도이다.

 

재특회에서 주장하는 재일이 생활보호수급을 쉽게 타먹는다는건 어느정도 사실이다.

 

왜냐면 일본에서 외국국적 사회적약자 취급을 받기 때문이다.

 

 

  

△ 오사카 여행을 가면 100% 들리게되는 도톰보리강.

 

 

 

자 , 그럼 오사카시에  어느 정도의 생활보호수급자가 있는지 알아보자.

 

일본전체 생활보호수급인은  2,15,1,165명이다.

 

오사카시의 생활보호수급인은 152,949명으로 아래 표에 나와있다.

 

이는 오사카시인구 270만명의 약 5.71%로  약 18명중 1명이 생활보호수급자라는 결론이 나온다.

 

이는 일본전체 생활보호수급자 1.69%의 3배에 달하는 수치이다.

 

 

 

△오사카시의 생활보호대상인구와 비율

 

 

참고로 오사카시에 사는 50세 생활보호수급자 독신남성의 경우

 

생활보호금 81,610엔 주택보조금 42,000엔 + 의료보조금 등으로 월 123,610엔 이상을 지원받는다.

 

3인가족이상은 더 지원받겠지?

 

 

 

 

 

한달에 12만엔이면 꽤 많은 액수다. 한국돈 150가까이되는 돈이니,

 

아무리 일본이라도 부정수급하는 사람이 없다는게 이상할것이다.

 

얼마전 한국국적의 클럽경영자가 생활보호비를 부정수급한게 일본뉴스에 보도된적이 있다.

 

그래서 재특회 등 우익단체들은 생활보호부정수급 및 자꾸 재일특권폐지를 요청하는거고.

 

 

 

 

 

 

오사카시의 크기는 서울특별시의 1/3보다 조금 크다.

 

오사카시의 광역행정구역인 오사카부의 경우는  서울 3배 크기에 인구 890만명.

 

서울 크기 1/3인 오사카시에는 24개의 자치구가 있다.

 

서울 1/3크기에 24개구가 있으니까(서울은 25구) 각 구의 크기와 인구는 상당히 작다.

 

대부분 한구의 인구는 5만~15만명정도이다.

 

 


  

이중 CHUO(츄오)구가  너희들이 자주가는 도톰보리,신사이바시등 시내중심지, 번화가 쇼핑지역이며

 

위의 KITA(키타)구는 오사카역과 우메다지구가 있는 도심지역이다.

 

 

 

그리고 IKUNO,HIRANO지역은  재일교포들이 5만명이상 몰려사는 일본최대 재일밀집지역이다.

 

전체 인구 270만명인 오사카시에 재일교포가 약 7만명이상 살고있다.

 

얼마전 재일교포가 '일본인은 다 죽여버리겠다'며 칼부림을 했던 지역도 IKUNO구다.

 

이 IKUNO구에는  코리아타운 및 한국시장, 한국유흥업소등이 몰려있다.

 

참고로 이명박 전대통령의 출생지가 현 HIRANO구다. 

 

 

 

 

 

아래는 오사카의 24개 자치구의 생활보호수급자비율이다.

 

1위 니시나리구  23.3%(100명중 23명이 생보자란 말)

2위 나니와구 9.65%

3위 이쿠노구 7.41%

4위 히라노구 7.11%

5위 스미요시구, 히가시스미요시구 6.47%로 나타나있다

 

 

니시나리구는 23.3%가 생활보호대상자라는 경이로운 수치를 나타내고있다.

 

2위의 나니와구도 니시나리구의 바로 윗지역으로 사실상 같은 동네라 보면된다.

 

재일교포들이 많이 사는 이쿠노구, 히라노구는  생활보호 수급자 비율이 상당히 높은편이다.

 

 

 

그렇다면 전체 인구의 1/4가까운 사람들이 생활보호수급자인 니시나리구는 도대체 왜 이렇게 생활보호대상자가 많을까?

 

이는 니시나리구에 아이린지구라는 일본최대의 일용직노동자촌, 노숙자촌이 형성되어있기 때문이다.

 

전국에서 많은 노동자들과 노숙자들이 모여들게되어 니시나리구는 일본최대의 할렘이 되고 말았다.

 

이 지역과 비슷한 지역은  도쿄의 산야, 요코하마의 코토부키쵸를 들수있다.

 

오사카 니시나리와 더불어 일본3대 일용직노동자마을이다.

 

 

 


△ 니시나리구의 빈민가 아이린지구.

 

 

 

아래는 헤이세이 원년인 1989년부터 2012년까지의

 

오사카시의 생활보호수급자 증가그래프이다.

 

 1989년당시 약 5만명이었지만 계속해서 늘어나 현재 15만명이 넘은 것을 볼수있다.

 

약 23년 사이에 3배 이상 늘어난 것을 볼수있다.

 

 
 

 

 

그렇다면 오사카는 도대체 왜 이렇게 생활보호대상자가 많은걸까?

오사카시청은 아래와 같이 설명하고있다.

 

 

 

 

 

 

 

1.실업률이 높다.

오사카의 실업률은 5.1%다.이는 일본평균 4.5%보다 높은수치다.

 

2.이혼율이 높다

오사카의 이혼율은 2.54%로 일본평균 1.87%보다 높게 나타나있다.

 

3.고령자세대와  단신세대가 많다.

오사카는 홀로 사는 노인들이 상당히 많다.

고령자비율(21.3%,일본평균19.4%)와 단신세대 비율(13.5%,일본평균 9.2%)이 일본평균보다 높다.

 

4.아이린지역의 존재(니시나리구에 27,992명의 생활보호대상자 거주)

일본최대 일용직노동자밀집지구에 일용직노동자의 고령화로 인한 생활보호대상자의 증가(23.3%가 생보자)

참고로 아이린지역 거주자들의 본적지는 오사카시 30% 오사카부 다른지역 15% 이고 

나머지 55%는 다른지역에서 몰려든 사람들이다.

 

 

 

 

 

위의 네가지가 오사카시에서 인정한 생활보호대상률이 높은 이유다.

 


 

일본애들은 한가지 더 붙히고 싶을것이다  바로 오사카= 대판민국이다. 재일이 많아서 생보자가 많다고 깐다.

 

일본애들이 까는 소스중하나인 오사카(大阪)의 한자에 대한민국의 민국을 붙혀서 大阪民国라고 조롱하는 사람들도 있다.

 

실제 270만인구의 오사카시에 재일교포가 75,000명 가량 살고있으니 전체인구의 2.8%가량으로 약 36명중 1명은 재일이란 얘기다.

 

한 학급이 35명~40명이라고 치면 한학급당 한명정도니까 상당히 많다.

 

 

 

실제 동경에서 오사카를 재일,빈곤,시민의식,도시의 더러움, 도쿄와 다른 성격 등으로 인해 욕하고 있다..

 

반면 오사카는 동경을 깍쟁이, 정이 없다, 최근 방사능오염등으로 욕하고 있다.

 

 

 

 

하지만 오사카는 맛있는 음식과 상인들의 정,화끈한 성격, 가끔 한국스러운 시민의식,엽기적인 사건..등등으로

 

한국인에겐 마치 안방같으면서 일본도 느낄수있는  안성맞춤인 일본여행지라고 생각한다.

 

 

    

△ 오사카 최대 쇼핑가 신사이바시의 풍경.

 

Posted by 쉬어가요
해외2014. 9. 1. 11:12



 



"그건 거대한 괴물임에 틀림이 없는 것 같다. 발자국이 땅에 나 있었는데, 둘레가 90cm나 되는 흔적을 만들었다.


발자국의 형태를 관찰한 후, 보폭을 측정해보니 그 동물의 보폭은 2.1 ~2.4m 정도 되는 것으로 보인다. "




1776년. "아프리카의 로안고, 카콩가 및 기타 왕국의 역사" 프로야트 저















"그 동물은 갈색과 회색이 섞인 것으로 대략적인 크기는 코끼리와 비슷하다. 길고 유연한 목을 지니고 있으며,


어떤 원주민은 그것이 아주 강한 꼬리를 가지고 있다고도 했다. 그 동물은 카누를 공격해서 인간을 살해하지만,


인간을 먹지는 않으며 그 동물은 동굴 속에서 산다고 한다. 낮에도 먹을 것을 찾아 활동하는 것으로 보이고,


일반적으로는 초식을 하는 것으로 추정된다. "






1914년. 카메룬 식민지 탐사를 위해 파견된 독일의 탐사대 대장 폰 스타인.

























 


 



모켈레 - 음베음베 (Mokele - mbembe)





모켈레 므벰베, 모켈레 브벰베 라고도 하나, 모켈레-음베음베가 정식 발음이다.



사실 이것도 정확한 발음은 아닌 것이, 일본을 통해 들어온 명칭이라 그래.



아마 정확한 발음은 콩고 원주민이 잘 말할 수 있지 않을까..




모켈레-음베음베는 혹시 아는사람이 있을까?

 

 콩고와 카메룬을 끼고 있는 늪지, 강 일대에서 목격되는 용각류 공룡과 비슷하다고 여겨지는 괴 생명체야.









1776년 프랑스 선교사가 쓴 책에 기록된 것이 문헌상 최초 기록이니



이 녀석도 스코틀랜드에서 날아오른 네시마냥 나이가 많을 것 같음.






모켈레 - 음베음베라는 이름의 뜻은, 콩고 원주민 말로 '강의 흐름을 막는 자' 라는 뜻이야



이름에서부터 뭔가 좀 커다랗고 좀 위험해보이는 분위기가 풍기지.





문헌상 기록은 1776년이 최초고, 



1914년 카메룬을 탐사하던 독일 탐험대가



원주민들이 공포에 떠는 존재에 대해 들은 것을 보고서에 기록한 것임.






현대에 들어와서 본격적인 관심은 1976년 즈음에 시작되었어.



텍사스의 파충류학자인 제임스 포웰이 그 근처를 여행하면서 모켈레 음베음베에 대한 전설을 들은 것으로부터 시작되지.



제임스 포웰은 원주민들이 그토록 공포에 떠는 존재가 무었인지 궁금해 했고,





신비동물학, 영어로는 cryptozoology. 


신비동물학회 회장인 로이 맥컬 교수에게 이야기를 했어.



그래서 1979년에 모켈레 음베음베를 탐사하기 위한 탐사대가 구성되지.





맥칼과 포웰은 콩고 공화국으로 향했어.



그리고 거기서 선교를 하던 선교사에게 모켈레 음베음베에 대한 전설을 듣지.



원주민들의 묘사에 따라서 스케치를 해 본 결과.




이 괴물은 아파토사우루스, 디플로도쿠스라는 공룡과 생김새가 매우 흡사하다는 것이 확인되었어.










"원주민들이 묘사한 바로는, 그 동물은 길이가 4.5~9m 정도 되는 것 같다. 이 길이의 대부분은 목과 꼬리가 차지하고 있는 듯 하고,



머리는 뱀 같고, 꼬리는 길고 가늘며, 몸통은 코끼리나 작은 경우 하마와 비슷하다고 하였다.



다리는 짧은 편이며, 뒷다리는 3개의 발톱을 지녔다.




그리고 머리 꼭대기에서 목 뒤 아래까지 등 주름을 가지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저 위에 찐한글씨 표시한게 뭐냐면,



저게 용각류 공룡에게서 나타나는 특징이야.



지역이 다름에도 불구하고 원주민들은 공통적으로 저 목주름을 묘사했어.




존재여부는 아직 모르겠지만 존재한다면 공룡일 가능성이 매우 큰 것이지.










그리고 맥컬과 포웰은 또 한가지 중요한 발견을 하게 된다.














 


 






바로 모켈레 음베음베의 발자국으로 추정되는 발자국을 발견한 것이지.




콩고 근처에는 확실히 이렇게 큰 동물이 살지 않아서



이것이 모켈레 음베음베의 발자국일 확률은 매우 높다고 볼 수 있어.





하지만 




1차 탐사는 아쉽게도 이걸로 종결.





2차 탐사대는 1981년에 짐을 꾸려서 떠났어.




그리고 이번에는 원주민들에게서 직접 접촉한 사례를 듣게 돼.




 


 



1960년대에 원주민들이 물고기를 잡기 위해서 강을 인위적으로 막아 놓았는데,



거대한 괴물이 그걸 뚫고 들어오려고 하자, 원주민들 다수가 동원되어 괴물을 죽였다고 해.



그리고 승리를 기념하기 위해서 고기를 요리해서 먹었는데,




먹은 녀석들은 다 즉사했다고 함.




이건 카더라이기때문에 원주민이 날조했을 가능성도 적지않아 있음.







그리고 멕컬 일행은 2차 탐사에서 모켈레 음베음베와 간접적인 접촉을 하게 되지.




멕컬 일행이 카누를 타고 에페나 마을 근처의 강을 돌고 있을 때,



멀리 떨어져 있던 둑에서 커다란 동물이 갑자기 잠수하면서



파도를 일으켜 멕컬의 카누를 치지.




그리고 그걸 본 원주민이 "모켈레- 음베음베!" 라고 소리쳤어.




멕컬 교수는



하마가 없고, 악어는 저런 파도를 낼 수 없다는 점을 들어



저 파도는 거대한 동물이 낸 파도이고, 그것은 모켈레 음베음베일 것이라고 확신해.





하지만 멕컬 교수는 직접 목격하지도 못하고, 그 괴물의 존재를 증명할 어떠한 사진 증거도 남기지 못한 채



아쉬움을 남기며 탐사를 마치게 되지.





 


 




이건 여담이지만,




모켈레 음베음베는 하마를 매우 싫어하여 보는 족족 공격하여 죽인다고 해.




그 일대에 하마가 없는건 모켈레 음베음베가 다 쫓아내버렸기 때문이라는군.




믿거나 말거나지. 그 미개한 원주민이 뭘 알겠어












그런데 1981년에 이 모켈레 음베음베에 대해 다시 관심이 쏠리게 된다.




 


 





좌측 위의 사진이 모켈레 음베음베가 누운 것으로 추정되는 흔적이다.





1981년에 캘리포니아 출신인 허만 레거스터는



자신의 탐험대를 이끌고 콩고로 가서



모켈레 음베음베가 자주 목격되었다는 Tele 호수에 도착.




그 호수를 탐험하는 동안에 그는 뱀처럼 긴 목을 가진 동물이 호수에서 솟아오르는 것을 목격했고,




그 기괴한 생명체는 탐험대와 몇 초간 눈을 마주친 채 다시 물 안으로 잠수했다고 한다.




그리고 이 탐사에서 최초로 모켈레 음베음베로 추정되는 생명체의 울음소리를 녹음하는데 성공해.



 









몇 년 뒤에는 콩고의 생물학자가 모켈레 음베음베라고 추정되는 생명체의 모습을 카메라에 담는 것에 성공함.


 


 


 



흐릿하여 잘 보이지 않지만, 굽은 등과 기다란 목을 확인할 수 있지



잠수한 코끼리일 가능성이 제기되었으나




그 근방에는 코끼리가 서식하지 않는 것이 확인되면서 모켈레 음베음베의 모습을 담은 것으로 거의 확실시 되었어




하지만 1997년에 조작된사진으로 밝혀졌다.



뒷배경이 콩고의 배경이 아닌 다른 지역이고, 인위적으로 흐릿하게 찍었다는 사실이 들통났지.



정말 네시때도 그렇고 조작해서 관심받고싶어하는건 인간의 종특같애









그리고 이 사진의 조작이 아직 밝혀지지 않은 와중에,




원주민 다큐멘터리를 찍기 위하여 비행기로 이동하던 일본 다큐멘터리 팀이




모켈레 음베음베로 추정되는 생명체의 모습을 비디오로 촬영에 성공한다.






 


 




잘 보이지 않지만 어쨋든 뭔가 거대한 생물이 강을 가로질러 헤엄치고 있는 것이 확실히 보인다.



모켈레 음베음베에 대한 최초의 동영상 촬영으로 유명해졌음.



참고로 일본에 모켈레 음베음베가 소개된 것이 바로 이 때문임.


 

하지만 이 동영상이 모켈레 음베음베의 존재를 증명하는 결정적 단서는 되지 못해.






왜냐하면 일단 너무 멀어서 무엇인지 제대로 식별되지 않고,



모켈레 음베음베의 특징인 긴 목이 제대로 확인되지 않는다는 점이야.



이 동영상으로 알 수 있는건 콩고에 저정도 크기의, 수영할수 있는 동물이 살고 있다 정도.






1914년 독일 탐사대의 보고서에도 쓰여 있지만,



이 일대는 숲이 굉장히 우거지고,



모켈레 음베음베가 자주 모습을 드러낸다는 우기의 경우에는



늪이나 진흙탕 때문에 탐사가 사실상 불가능해진다.




94년 콩고 내전으로도 알 수 있듯이



탐사를 하러 깊이 들어갈수록 적대적인 게릴라와 마주칠 수도 있기 때문에




모켈레 음베음베에 대한 자세한 탐구는 여전히 힘들 것으로 보여.




제일 최근으로는 2002년에 소수정예로 탐사를 간 듯 한데, 딱히 정보가 없으니 별 수확 없이 끝난 것 같다.









하지만 그 일대는 6500만 년 공룡이 살았던 시대와 비교해서 달라진게 거의 없다고 해.



백악기 시대의 식물이 발견되기도 했다니까, 공룡이 살아있을 가능성은 어느 정도 있다고 봐.



그리고 과학자들이 공룡이 생존해있을 것으로 추측하는 곳들 중 하나가 바로 여기다.








김빠지는 소리 살짝 하자면,



'가능성' 이다. 어디까지나 가능성일 뿐이다.



지구상 여러 곳들 중에 그나마 살아있을 수 있는 확률이 높다 뿐이지



과학적으로 아프리카에 공룡이 생존해 있다고 보기는 매우 어려움.



그리고 지금까지 얻은 어떠한 사진, 증언, 흔적들도



이 괴물의 존재를 증명해내지는 못했어.




 

아프리카에는 심해만큼 우리가 아직 정의내리지 못한 미지의 동물은 충분히 있다고 생각하지만



그게 공룡이라고 생각하기는 쉽지않을것같아





어쨋든 탐사하기엔 여러 어려움이 따라서



네시마냥 이녀석이 조작이다! 라고 확실히 말할 수도 없고



그렇다고 이녀석이 존재한다! 라고 말할 수도 없어.




그러니까 판단은너희들 몫이야

 

Posted by 쉬어가요
해외2014. 8. 25. 13:04

 

네스호


 

네스호의 괴물, 네시에 대해 한번 알아보자

 

 



 


 

네스 호는 영국의 스코틀랜드에 위치하고 있는 호수야.


빙하가 지나간 흔적으로 발생한 호수인데 이게 나중에 네시 존재 증명을 위한 중요한 단서야.


오대호 제외하고 가장 큰 호수라던데 정확한건 아냐 ㅋ


큰것도 큰건데 호수의 깊이도 깊어서 가장 깊은 곳은 230m정도 된다고 하는데 호수 치고 깊이는 어마어마한편



큰 호수로서 유명하기도 하지만 네스 호는 여기 살고있는 '네시' 또는 '네스 호의 괴물'로 상당히 유명세를 타고 있어.



 


네스 호 괴물의 전설은 꽤 오래 전부터 있었던 거 같음.


문헌상으로 가장 오래된 기록이 565년이라고 하니 살아있다면 한민족 역사의 5분의 1을 차지하는 괴물님이네 


하지만 괴물 전설이 565년부터 꾸준히 전해진 건 아니야


네스호는 지형이 험난해서 사람들이 드나들기 힘들었거든


사람의 왕래가 잦지 않다 보니 내 상각에는 괴물도 자연스레 잊혀지지 않았을까 싶어



그런데 1933년에 네스호를 지나는 도로가 완공되면서 괴물 전설이 다시 고개를 내밀지.


1933년 호수를 산책하던 한 부부가


마치 '거대한 오리' 혹은 '대형 민달팽이'를 연상시키는 물체가 호수 산책로를 가로막고 있었다고 해


이 목격담이 최초인진 모르겠으나 이 목격담을 필두로 네스 호의 괴물 목격담은 점점 늘어나기 시작하지.



 

 


(왼편으로 보이는 그림자같은 물체가 네시다.)



1933년 11월에는 회사원인 그레이가 최초로 괴물 촬영에 성공하기도 해.


괴물의 몸통과 꼬리 부분이 찍혀있었지만 너무나 흐릿하기 때문에 식별이 잘 되지 않았어.


하지만


괴물의 존재를 증명할, 다들 한번쯤 봤을법한 역대급 사진이 나오게 되지.









 


 


외과의사 윌슨이 1934년 네시를 촬영에 성공했어.


사진 전문가들의 꼼꼼한 분석으로 조작이 없다는 것을 확인받으면서 향후 30년 이상 네시의 존재를 증명하는 결정적인 단서가 되어줬어.


그리고 후에 NASA 분석으로 괴물의 턱에 수염이 달려있다는 것도 알아냈다는데 이건 믿거나 말거나..



여튼 윌슨의 촬영으로 네스호의 네시는 세계적인 스타가 되지


영화사에서 괴물을 찍기 위해 촬영을 오기도 하고, 생물학자나 과학자들이 네시의 정체를 밝혀내기 위해 고군분투하지.


또 네시를 보기 위한 관광객들로 호수 주변 숙박업소들은 문전성시를 이뤘다고 해.



윌슨의 사진을 시작으로 수 많은 괴물 사진이 찍히기 시작해.




 


 


저 위의 윌슨 사진 다음 다음으로 널리 퍼진게 아마 이 사진일거야


근데 이건 호수에 치던 물결을 인위적인 사진 보정으로 괴물처럼 보이게 만든 것으로 밝혀졌지





 


 


이것도 졸라 유명한 사진이야.


네시에 대해 알고있었다면 이 사진도 확실히 분명히 봤을거야


언뜻 보기에는 윌슨의 사진과 비슷하지만 이건 컬러사진이고 농부가 촬영한거다.



사진이 워낙 정교하여 조작의 가능성이 낮다고 하였으나


내셔널 지오그래픽에서 물에 비친 그림자와 목을 내놓은 물결의 형태를 들어


네스 호 사진 위에다가 정교하게 그린 그림이라는게 밝혀졌어.



수많은 주작사진과 괴물인지 아닌지 모를 그림자만 딸랑 찍혀있는 사진이 판을 치기 시작해서


거스트 2000 이라는 해양생물학, 고생물학 전문가들 등으로 이루어진 괴물 사냥꾼 팀이 탄생해.


정말 네시는 존재하는가? 존재한다면 어떠한 생물인가? 정말 플레시오 사우르스의 생존자인가? 하는 의문증을 풀기 위함이지.



많은 사람들의 기대 속에 이 조사단은 네스 호 곳곳을 약 4개월간 샅샅이 뒤져


호수 근처에 설치해놓은 카메라로 호수를 가로지르는 두 개의 그림자를 촬영에 성공하기도 하고


호수 근처의 진흙에 찍혀있는 발자국을 찾아내기도 하지만,

발자국의 경우에는 오리의 발자국이 비로 인해 확대되어 그렇게 보인다는 걸로.. 밝혀짐




괴물인지 아닌지도 모를 그림자 사진 딸랑 한장,


별다른 수확이 없던 거스트 2000은 이제 다른 방식의 분석을 시작해.


네시가 존재하지 않는다는 방향으로 분석을 하는거지.




먼저 네시의 목격담은 호수에 도로가 생긴 1933년부터 폭발적으로 급증하기 시작했어.


즉, 사람의 착각이 만들어낸 허상일수도 있다는 거지.



실제로 네스 호에는 수십 대의 보트가 매일 다니면서 잔상을 남기고


또한 여름의 더위가  겹쳐져서 호수 위에다가 일종의 신기루 비슷한 현상을 만들어놓기도 해


거기다가 괴물이 나온다는 괴담이 사람들 머릿속에 겹쳐지면서


괴물 목격담을 다시 낳았다는 것이지.




네스 호에다가 큰 통나무를 던져 넣고 지나가는 사람들에게 호수에서 무엇을 보았냐고 물어보았어.



놀랍게도 대다수의 사람들이 통나무에서 머리를 보았다고 해.



이 실험 결과와 여러가지 정황상 증거는 네시의 존재를 부정하는 의견을 급부상시켜



이러한 분위기에 힘입어 한 영화사는 괴물에 대한 촬영을 성공하면 10만 달러를 지급하겠다고 현상금을 걸지.


그리고 괴물이라고 인정될 크기는 10m 이상이라는 조건도 덧붙여두었어.




 


 

그래서 촬영된 사진이 바로 이 수중 촬영 사진이야.


긴 목과  밑 부분에 보이는 지느러미, 누가 봐도 네스 호의 괴물 네시와 흡사한 사진이야.



하지만 길이가 2.5m에 불과하여 괴물로 인정받지 못했고 상금도 타지 못했어,


걍 중상급의 어그로?를 끌긴 햇지





네시가 존재하지 않는다는 측의 의견은 크게 세가지야.


첫째로는 네시에는 네시가 먹을 충분한 먹잇감이 없어.



네스 호에 살고 있는 물고기는 200톤 정도로 플레시오 사우르스 취급받는 네시가 먹고살기에는 충분치 않아.



둘째로는 네시의 촬영된 사진 중에는 목을 내밀고 있는 사진이 별로 없다는 점이야.


윌슨의 사진을 제외하고는 전부 다 등쪽, 등을 내밀고 호수를 헤엄치는 네시가 찍혀있지.


하지만 수장룡의 경우에는 숨을 쉬러 정기적으로 호수 밖으로 나와 숨을 쉬어야 하기 때문에


사진이 찍힌다면 목을 내밀고 숨을 쉬는 모습이 더 많이 찍혔어야 이치에 맞아.



셋째로는 네스 호의 역사 때문이야.

네스 호는 빙하기 이후에 만들어진 호수야.


빙하기를 거친 공룡이 이 호수에 살아있을 수 없다는 이야기지.


그리고 플레시오사우르스는 바다에 살던 녀석이야.


염수에서 살던 녀석이 담수에 적응하기란 힘들지. 그 반대의 경우라면 사례가 오히려 더 많을 정도.



위 세가지 이유를 들며 네시의 존재를 부정했지만



그때까지 네시가 있다는 사람들이 많았던 이유는 윌슨의 사진 때문이었어.


네시 지지파들은 그럴리가 없다고 외치며 과학적 근거를 들이대는 과학자들을 윌슨의 사진으로 응징했지.








하지만 윌슨의 사촌동생이 임종 직전에 조작이었던 것을 밝혀


 



드디어 인류 역사에 남을 주작이 밝혀진 순간이야.


윌슨은 자신의 동생 둘과 함께 모형 잠수함을 사고, 잠수함 위에 나무를 깎은 괴수 모형을 만들었지.


그리고 호수에 띄운 다음 약 20차례의 촬영을 통해 가장 잘 나온 사진을 신문사에 제보한거야.




이로서 네시가 존재한다는 모든 증거는 부정되었어.


네시가 존재한다는 측에 큰 힘을 실어주었던 이 사진마저 날아오르면서 네시는 이제 존재하지 않는 동물로 치부되기 시작해.



한가지 실낱같은 희망이 있다면


BBC에서 네스호에 대해 치밀한 조사를 했는데.



'실제로 네시와 같은 수장룡이 살고 있는지는 모르겠지만 네스 호에는 중간 크기의 어류 포식성 생물이 분명히 존재 한다.'


라는 결론을 냈어.




뭐 저것도 주류 이론에 따르면 어쩌다 흘러들어온 철갑상어라는 의견이지.


개인적인 생각으로 네스 호 소동은 스코틀랜드 관광청과 네스 호 근처 주민들이 관광 수입을 위해 꾸며낸 자작극일 확률이 높다고 봄.



그러함에도 네시가 아직까지 비교적 인기를 끌고 있는 이유는 


인간의 미지에 대한 동경? 호기심? 두려움? 때문이 아닐까

 

Posted by 쉬어가요